소크라테스의 변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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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소크라테스의 변론은 기원전 399년 소크라테스가 아테네에서 불경죄와 청년 타락 혐의로 기소되어 재판을 받은 과정을 다룬 플라톤의 저작이다. 소크라테스는 자신의 철학적 활동을 변호하며, 델포이 신탁에서 비롯된 자신의 무지에 대한 자각과, 영혼의 중요성, 정의로운 삶을 강조했다. 재판 결과 유죄를 선고받고 사형에 처해졌지만, 그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자신의 소신을 굽히지 않았다. 이 작품은 소크라테스의 사상과 삶을 보여주며, 비판적 사고, 진리 추구, 정의로운 삶의 중요성을 현대 사회에 일깨워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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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크라테스의 변론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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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 정보 | |
서지 정보 | |
원제 | Ἀπολογία Σωκράτους (Apología Sōkrátous) |
라틴어 제목 | Apologia Socratis |
영어 제목 | Apology of Socrates |
저자 | 플라톤 |
작성 시기 | 기원전 399년경 |
장르 | 소크라테스 대화편 |
언어 | 고대 그리스어 |
배경 | 소크라테스의 재판 |
등장인물 | |
주요 등장인물 | 소크라테스 |
내용 요약 | |
주제 | 소크라테스의 재판과 변론 |
내용 | 소크라테스가 자신을 고소한 죄목에 대해 반박하고 자신의 삶과 철학을 변호함 멜레토스, 아니토스, 뤼콘 등의 고발자들을 비판함 죽음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밝힘 배심원들에게 자신의 무죄를 주장함 |
주요 주장 | |
변론의 핵심 | 무지를 자각하는 것이 지혜의 시작임을 강조 철학적 탐구를 통해 영혼을 돌보는 것의 중요성을 역설 다수의 의견보다는 정의와 진리를 추구해야 함을 주장 |
불의에 대한 소크라테스의 태도 | 죽음보다 불의를 행하는 것을 더 두려워함 시민들의 의견이나 평가보다는 신의 명령에 따르겠다고 주장 |
역사적 배경 | |
배경 사건 | 펠로폰네소스 전쟁 이후 아테네의 혼란스러운 사회적 분위기 |
재판 결과 | 소크라테스가 사형을 선고받음 |
영향 및 해석 | |
철학적 중요성 | 소크라테스의 철학적 사상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자료 |
윤리적 의미 | 정의, 진실, 양심에 대한 중요한 질문을 제기 |
후대에 대한 영향 | 플라톤을 비롯한 후대 철학자들에게 큰 영향을 미침 |
추가 정보 | |
관련 저작 | 크세노폰의 《소크라테스의 변론》 |
번역 | 다양한 언어로 번역되어 출판됨 |
2. 역사적 배경
기원전 399년, 소크라테스는 "국가가 믿지 않는 신들을 도입하고 청소년을 타락시켰다"는 죄목으로 종교범죄인 "신성 모독죄"(ἀσέβεια|아세베이아el)로 기소되어 재판을 받게 되었다.[23] 이 재판은 펠로폰네소스 전쟁에서 아테네가 패배하고 삼십인 정권이 들어서는 등 정치적 혼란 속에서 이루어졌다.
소크라테스는 사람들이 무언가를 안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모르고 있다는 것을 지적하며, 자신은 모른다는 것을 알고 있다는 점에서 다른 사람보다 조금 더 지혜롭다고 주장했다. 그는 사람들에게 무지를 깨우치는 것이 신의 뜻이라고 생각하여 대화를 통해 사람들의 억측을 깨뜨리려 했고, 이 때문에 사람들의 앙심을 사게 되었다. 특히 소크라테스가 “신령(다이모니온)”으로부터 계시를 받고 있다고 공언한 것이 “새로운 신격을 도입했다”는 비난의 원인이 되었다.[22]
하지만 그는 신체나 재산보다 진리를 사랑하고 정신을 높이는 일에 마음을 써야 한다고 주장하며, 자신의 행동을 바꾸지 않겠다고 밝혔다. 결국 소크라테스는 사형을 선고받았지만, 죽음 앞에서도 자신의 소신을 굽히지 않았다.
플라톤의 ''소크라테스의 변론''은 소크라테스 재판(기원전 399년) 이후 10년 안에 출판된 초기 철학적 변론으로, 소크라테스적 대화 형식으로 제시되었다.[5] 아리스토텔레스는 이것을 허구의 한 장르로 분류했지만,[6][7] 여전히 철학자 소크라테스(기원전 469–399년)에 대한 유용한 역사적 자료이다.[8]
2. 1. 펠로폰네소스 전쟁과 아테네의 패배
기원전 404년, 펠로폰네소스 전쟁에서 아테네가 스파르타에 패배한 후, 아테네에서는 친스파르타파인 삼십인 정권이 성립하여 공포 정치를 자행했다. 삼십인 정권은 1년 남짓의 짧은 기간에 붕괴되었지만, 권력을 탈환한 민주파 세력 내부에서는 펠로폰네소스 전쟁 패전과 삼십인 정권의 참화를 초래한 원인과 책임을 추궁하는 과정에서 소피스트, 철학자 등 “이단자”들을 규탄하고 배제하려는 움직임이 있었다.[21]2. 2. 삼십인 정권
기원전 404년, 펠로폰네소스 전쟁에서 아테네가 스파르타에 패배한 후, 아테네에서는 친스파르타파 삼십인 정권이 성립되어 공포 정치를 자행했다. 삼십인 정권은 1년 남짓의 짧은 기간에 붕괴되었지만, 권력을 탈환한 민주파 세력 내부에서는 펠로폰네소스 전쟁 패전과 삼십인 정권의 참화를 초래한 원인과 책임을 추궁하는 과정에서 소피스트·철학자 등 “이단자”들을 규탄하고 배제하려는 움직임이 있었다.소크라테스는 펠로폰네소스 전쟁에서 치명적인 역할을 한 알키비아데스나 삼십인 정권의 주도자였던 크리티아스 등과 교류가 있었고, 그들을 교육한 스승으로 여겨졌기 때문에 규탄과 배제 대상 중 한 명이 되었다.[21]
2. 3. 민주정 복구와 혼란
펠로폰네소스 전쟁에서 아테네가 스파르타에 패배한 후 기원전 404년, 아테네에서는 친스파르타파인 삼십인 정권이 성립하여 공포 정치를 자행했다. 삼십인 정권은 1년 남짓의 짧은 기간에 붕괴되었지만, 권력을 탈환한 민주파 세력 내부에서는 펠로폰네소스 전쟁 패전과 삼십인 정권의 참화를 초래한 원인과 책임을 추궁하는 과정에서 소피스트·철학자 등 “이단자”들을 규탄하고 배제하려는 움직임이 있었다.[21]2. 4. 소크라테스에 대한 반감
펠로폰네소스 전쟁에서 아테네가 스파르타에 패한 뒤, 아테네에는 친스파르타파인 삼십인 정권이 들어서 공포 정치를 펼쳤다. 삼십인 정권은 1년 만에 무너졌지만, 민주정을 되찾은 세력 안에서도 전쟁 패배와 삼십인 정권의 만행에 대한 책임을 묻는 과정에서 소피스트나 철학자 같은 "이단자"들을 비난하고 몰아내려는 움직임이 있었다.알키비아데스나 삼십인 정권의 우두머리였던 크리티아스와 가깝게 지내고, 그들의 스승으로 여겨졌던 소크라테스는 이러한 비난의 대상 중 하나였다.[21]
3. 소크라테스에 대한 고발 내용
소크라테스는 기원전 399년, 아테네 법정에서 다음 두 가지 혐의로 재판을 받았다.[1]
- 아세베이아(ἀσέβεια): 아테네의 신을 믿지 않고 새로운 신을 도입했다는 불경죄.
- 아테네 청년 타락: 젊은이들을 잘못된 길로 이끌었다는 죄.
소크라테스는 이러한 고발이 수년간의 소문과 편견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주장했다. 특히 희극 시인 아리스토파네스가 자신의 희극 《구름》에서 자신을 사기꾼이자 궤변론자로 풍자한 것이 고발의 배경이 되었다고 말했다.
소크라테스를 고발한 주요 인물은 다음과 같다.
- 아니투스: 부유하고 영향력 있는 아테네인으로, 소피스트를 반대했다. 그는 장인과 정치가들을 대표하여 소크라테스를 고발했다.[10]
- 멜레토스: 소크라테스 재판에서 직접 소크라테스와 논쟁을 벌인 인물이다. 그는 시인들을 대표하여 소크라테스를 고발했다.[11]
- 리콘: 웅변가들을 대표하여 소크라테스를 고발했다.[12]
소크라테스는 법정에서 멜레토스와의 논쟁을 통해 그의 주장에 모순이 있음을 지적했다. 멜레토스는 소크라테스가 무신론자라고 주장하면서 동시에 그가 정령과 반신을 믿는다고 비난했는데, 이는 논리적으로 양립할 수 없는 주장이었다.
3. 1. 아테네 청년 타락
소크라테스는 아테네의 부유한 젊은이들이 시간이 남아 도시를 돌아다니며 자신이 다른 아테네 사람들의 주장에 질문하고 그들의 허세를 밝혀내는 것을 관찰한다고 설명했다. 그 결과 젊은이들은 소크라테스의 방법을 모방하게 되었다.[1] 소크라테스는 자신이 조사한 사람들의 주장이 부족하다고 생각했고, 체면을 잃지 않기 위해 그들은 소크라테스를 궤변과 무신론으로 아테네 청년을 타락시키는 도덕적으로 혐오스러운 사람이라고 비난했다고 말했다. 소크라테스는 "조사받는 사람들은 스스로에게 화를 내는 대신 나에게 화를 냅니다!"라고 덧붙였다.[1]3. 2. 불경죄 (새로운 신 도입)
소크라테스는 아테네의 신들을 믿지 않고 "다이모니온"이라는 새로운 신을 도입했다는 혐의를 받았다.[1] 소크라테스는 어린 시절부터 "다이모니온의 목소리"를 듣는다고 주장했는데, 이 목소리는 항상 무언가를 경계하고 금지하며 억제하기 위해 나타났다고 한다.[1] 이러한 주장이 "새로운 신을 도입했다"는 비난의 주된 근거가 되었다.[1] 소크라테스는 이 "다이모니온의 목소리"가 자신에게 정치에 관여하는 것을 경계했다고 말했다.[1] 또한 재판과 관련하여 "다이모니온의 목소리"가 나타나지 않았으므로, 이번 죽음은 분명 좋은 일일 것이라고 청중에게 말했다.[1]4. 소크라테스의 변론
기원전 399년, 소크라테스는 부당한 죄목으로 고발당하여 법정에 서게 되었다. 소크라테스는 자신의 혐의에 대해 변론하며, 사람들이 무지하면서도 안다고 착각하는 현실을 지적했다. 그는 자신이 모른다는 것을 안다는 점에서 다른 사람보다 지혜롭다고 주장하며, 이것이 델포이 신탁에서 "소크라테스가 가장 현명하다"라고 한 이유라고 설명했다.
소크라테스는 사람들의 무지를 깨우치는 것이 신의 뜻이라고 믿고, 대화를 통해 사람들의 억측을 깨뜨리는 일에 전념했다. 이 때문에 사람들의 앙심을 샀지만, 그는 진리를 추구하고 정신을 고양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소크라테스는 "어떻게 하든 나는 결코 나의 행동을 바꾸지 않을 것이다. 설사 몇 번이나 죽음의 운명에 위협을 받는다 해도"라며 자신의 신념을 굽히지 않았다.
결국 소크라테스는 사형을 선고받았지만, 두려움 없이 자신의 소신을 밝혔다. 그는 "하지만 이제 떠날 때가 왔다. 나는 죽기 위하여, 여러분은 살기 위해서. 그러나 그 어느 것이 더 행복한가에 대해서는 신 이외에 아는 자는 없다"라는 말을 남겼다.
플라톤의 저서 ''소크라테스의 변론''은 소크라테스가 부패 및 불경죄 혐의에 대한 법적 변호를 설명하는 여러 ''변론'' 중 하나로, 소크라테스적 대화 형식으로 제시되었다. 소크라테스는 재판에서 자신의 언어 사용이 즉흥적일 것이며, 법정 방식에 익숙하지 않다고 말했다. 또한 자신이 가진 지혜는 자신이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을 아는 것에서 온다고 주장했다(23b, 29b).
재판 과정에서 소크라테스는 고발자들을 풍자하고, 배심원들에게 자신의 수사적 기술이 아닌 진술의 진실성에 따라 판단해 줄 것을 요청했다. 그는 정교한 언어가 아닌 그리스어의 일반적인 관용구를 사용하여 말할 것이라고 했다. 타락과 불경죄 혐의에 대한 최소한의 양보를 통해 배심원들의 편견을 달래줄 기회를 얻었음에도 불구하고, 소크라테스는 사형 선고를 피하기 위해 자신의 강직성을 굽히지 않았다.
소크라테스는 자신이 젊은 시절 적들에 의해 사상이 오염되었다고 말하며, 희극 작가 아리스토파네스가 ''구름''에서 자신을 협잡꾼 철학자로 풍자했다고 언급했다. 아테네의 부유한 젊은이들을 타락시켰다는 혐의에 대해서는 고의적인 타락은 자신에게도 해가 되기 때문에 비논리적인 행동이라고 주장했다.
소크라테스는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은 무지를 보여주는 것이라고 말했다. 죽음은 좋은 일일 수도 있지만, 사람들은 그것이 악인 것처럼 두려워한다는 것이다. 그는 자신의 지혜는 자신이 무지하다는 것을 인식하는 데 있다고 말했다.[15]
소크라테스는 법정에서 감정적이고 선동적으로 말하지 않고, 아테네에 일어날 가장 큰 선은 그가 동료 시민으로서 그들에 대한 도덕적 관심이라고 말했다. 그는 물질적인 부는 선의 결과이며, 신은 더 나은 사람이 더 나쁜 사람에게 해를 입는 것을 허용하지 않으며, 자신은 아테네에 필요한 사회의 각성제라고 생각했다.
소크라테스는 자신이 결코 유료 교사가 아니었기 때문에 아테네 시민의 타락에 책임이 없다고 말했다. 그는 재판에서 자신의 주장을 제시하기 위해 건전한 논리와 진실에만 의존할 것이라고 말했다.
플라톤의 재판 기록에서 소크라테스는 배심원들을 진실로부터 멀어지게 하도록 설계된 기만적인 수사적 관행으로서 수사학을 조롱한다.
4. 1. 고발인들에 대한 반박
소크라테스는 고발인들, 특히 리콘, 아니토스, 멜레토스가 자신을 청년들을 타락시키고 아테네의 신을 믿지 않는 불경죄로 고발했지만, 그들의 변론은 설득력이 없다고 말한다. 그는 자신의 언변이 서툴고 법정에 익숙하지 않지만, 진실만을 말할 것이라고 주장한다. 소크라테스는 자신이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을 아는 지혜를 가지고 있다고 설명한다.[1]소크라테스는 배심원들에게 자신의 수사적 기술이 아닌 진술의 진실성에 따라 판단해 줄 것을 요청한다. 그는 정교한 언어가 아닌 그리스어의 일반적인 관용구를 사용하여 아고라와 돈을 거래하는 장소에서 사용했던 방식으로 말할 것이라고 한다.
소크라테스를 고발한 세 사람은 다음과 같다.
이름 | 설명 |
---|---|
아니투스 | 소피스트를 반대한 부유하고 사회적으로 저명한 아테네인[10]으로, 장인과 정치가를 대표하여 소크라테스를 고발했다. |
멜레토스 | 소크라테스의 자기변론 중에 발언한 유일한 고발자로, 시인들을 대표하여 소크라테스를 고발했다.[11] 소크라테스는 그를 매부리코를 가진 알려지지 않은 젊은이로 묘사한다. |
리콘 | 전문 웅변가들을 대표하여 소크라테스를 고발했다.[12] |
소크라테스는 자신에 대한 고발 내용이 수년간의 소문과 편견에서 비롯된 것이며, 희극 시인 아리스토파네스가 이미 희극 ''구름''(기원전 423년)에서 자신을 사기꾼이자 무신론자로 풍자했다고 말한다. 그는 자신이 소피스트가 아니며, 극심한 가난 속에 살고 있다고 변론한다.
4. 1. 1. 멜레토스와의 논쟁
멜레토스는 소크라테스를 아테네 청년들을 타락시키고, 아테네의 신을 믿지 않고 새로운 신을 믿는다는 불경죄 혐의로 고발하였다.[14] 소크라테스는 멜레토스를 심문하며 그의 주장에 모순이 있음을 밝혀낸다.먼저 소크라테스는 멜레토스에게 아무도 고의로 다른 사람을 타락시키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타락한 사람은 결국 자신에게 해를 끼칠 것이기 때문이다. 소크라테스는 자신이 아테네 청년들을 타락시켰다면, 이는 고의가 아니며, 멜레토스가 청년 교육에 대해 무관심하다고 비판한다.
또한 소크라테스는 멜레토스가 소크라테스를 무신론자라고 하면서, 동시에 정령과 반신을 믿는다고 주장하는 것은 모순이라고 지적한다.[15] 소크라테스는 멜레토스에게 논리적 모순을 묻는 질문을 던지며, 그가 소크라테스를 함정에 빠뜨리려 한다고 비판한다.
4. 2. 자신의 철학적 활동 변호
소크라테스는 자신이 사람들의 무지를 깨우치고 진리를 추구하도록 돕는 것이 신의 뜻이라고 주장한다. 그는 델포이 신탁에서 "소크라테스보다 현명한 자는 없다"라는 말을 듣고, 그 의미를 찾는 과정에서 자신의 사명을 깨달았다고 말한다.소크라테스는 아테네 사람들에게 무지를 자각하고 진정한 지혜를 추구하도록 촉구했다. 그는 사람들과의 대화를 통해 그들이 실제로는 무지하다는 것을 드러냈고, 이를 통해 사람들이 스스로를 돌아보고 진리를 탐구하도록 이끌었다. 소크라테스는 이러한 활동이 신의 뜻을 따르는 것이라고 믿었다.
소크라테스는 사람들이 돈, 명예, 권력과 같은 세속적인 가치에만 몰두하고, 진리, 정의, 덕과 같은 정신적인 가치를 소홀히 하는 것을 비판했다. 그는 "여러분은 가능한 한 많은 돈을 모으는 데만 신경 쓰고, 명성과 명예에도 신경 쓰면서, 진실과 이해, 그리고 여러분 영혼의 완성에는 전혀 신경 쓰지 않는 것을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습니까?"(29e)라고 질문하며, 사람들이 진정으로 추구해야 할 가치가 무엇인지 고민하도록 만들었다.
소크라테스는 자신의 철학적 활동이 사람들의 미움을 사 결국 자신을 죽음으로 몰고 갈 것을 알면서도 멈추지 않았다. 그는 "나는 죽기 위하여, 여러분은 살기 위해서. 그러나 어느 것이 더 행복한가에 대해서는 신 외에 아는 자는 없다"라는 말을 남기며, 자신의 신념을 굽히지 않았다.[14]
4. 2. 1. 델포이 신탁과 "너 자신을 알라"
델포이의 신탁은 "소크라테스보다 현명한 자는 없다"라고 선언했다.[14] 소크라테스는 이 신탁을 수수께끼로 여겼다. 왜냐하면 그는 자신이 "크든 작든" 지혜를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신은 거짓말을 할 수 없으므로, 소크라테스는 이 역설을 풀기 위해 정치가, 시인, 장인들을 찾아가 그들의 지혜를 시험했다.그 결과, 소크라테스는 정치가들이 자신처럼 현명하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는 정치가를 보며 "나는 이 사람보다 현명하다. 아마 우리 둘 다 가치 있는 것을 아는 것이 없겠지만, 그는 아무것도 모르면서도 무언가를 안다고 생각한다"라고 생각했다.[15] 시인들은 자신의 시를 이해하지 못했고, 예언자와 점쟁이들은 자신이 말한 것을 이해하지 못했다. 장인들은 많은 것을 알면서도 자신이 전혀 알지 못하는 것에 대해서도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다고 착각했다.
이러한 경험을 통해 소크라테스는 델포이 신탁의 의미를 깨달았다. 그는 자신이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을 안다는 점에서 다른 사람들보다 현명했다. 즉, "무지의 지"를 깨달은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델포이 신탁의 대변자로서, 아테네 사람들에게 무지를 자각시키고 진정한 지혜를 추구하도록 촉구하는 역할을 맡았다(22e).
소크라테스는 자신의 문답법(도상법(問答法))이 사람들의 무지를 드러내고 진리를 추구하도록 돕는 방법이라고 설명한다. 그는 "모르는 것을 아는 것으로 착각하는" 사람들보다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자각하는" 자신이 더 현명하다고 결론 내렸다.
소크라테스는 진정한 지식을 추구하고 영혼을 돌보는 것을 강조하며, 이것이 신으로부터 받은 자신의 사명이라고 말한다. 그는 국가의 명령이 이것을 금지하려 해도 결코 멈추지 않을 것이라고 선언한다.
4. 2. 2. 아테네의 등에
소크라테스는 자신을 아테네에 꼭 필요한 '등에'에 비유했다. 그는 아테네 시민들을 끊임없이 자극하여 올바른 삶을 살도록 하는 것이 자신의 역할이라고 주장했다.[14] 그는 등에가 말을 쉴 새 없이 움직이게 하듯, 자신도 아테네 시민들이 무지와 나태함에 빠지지 않도록 질문하고, 논쟁하고, 비판하며 그들을 괴롭힌다고 말했다.소크라테스는 델포이 신탁에서 "소크라테스보다 현명한 자는 없다"라는 신탁을 받은 후, 이 말의 의미를 찾기 위해 사람들과 대화하며 그들의 무지를 깨닫게 되었다고 한다.[15] 그는 이러한 자신의 활동이 신의 뜻이라고 믿었으며, 사람들에게 진정한 지혜를 추구하고 영혼을 돌보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그는 사람들이 돈, 명예, 권력과 같은 세속적인 가치보다 진리, 정의, 덕과 같은 정신적인 가치를 추구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소크라테스는 이러한 철학적 활동 때문에 사람들의 미움을 샀지만,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자신의 신념을 굽히지 않았다. 그는 죽음이 무엇인지 알 수 없기 때문에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고 말하며, 불의를 행하는 것보다 죽음을 택하겠다고 선언했다. 그는 아테네 시민들에게 "여러분은 가능한 한 많은 돈을 모으는 데만 신경 쓰고, 명성과 명예에도 신경 쓰면서, 진실과 이해, 그리고 여러분 영혼의 완성에는 전혀 신경 쓰지 않는 것을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습니까?"(29e)라고 일침을 가했다.
5. 재판 결과와 소크라테스의 죽음
소크라테스는 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았지만, 시종일관 두려움 없이 자신의 소신을 밝혔다. 그는 "이제 떠날 때가 왔다. 나는 죽기 위하여, 여러분은 살기 위해서. 그러나 그 어느 것이 더 행복한가에 대해서는 신 이외에 아는 자는 없다."라고 말했다.[20] 이 말은 플라톤의 저서 ''소크라테스의 변론''에 기록되어 있으며, 소크라테스의 영혼과 철학을 보여주는 명문장으로 평가받는다.
5. 1. 유죄 판결과 형량
배심원단은 근소한 차이로 소크라테스에게 유죄를 선고했다. 플라톤의 ''소크라테스의 변론''에는 소크라테스를 유죄 또는 무죄로 판결한 배심원단의 투표 총수가 언급되어 있지 않다.[17] 소크라테스는 배심원 30명만 더 자신의 편에 섰다면 무죄 판결을 받았을 것이라고 말한다.[17] 만약 법정이 500명의 배심원으로 구성되었다면, 280명이 소크라테스에게 유죄, 220명이 무죄에 투표했을 가능성이 높다. 이는 약 12%의 차이다.[18]사형이 가능한 경우, 아테네 법은 검사와 피고인 양쪽 모두에게 혐의에 대한 처벌을 제안하도록 했다. 소크라테스는 처벌 대신, 공공 비용으로 평생 동안 생계를 유지하는 것을 제안하여 법정을 자극했다. 그는 자신에 대한 유죄 판결 투표가 근소했다는 점에 주목하며, 검사인 멜레토스가 소크라테스에 대한 혐의에 찬성하는 배심원 표가 1/5에 미치지 못해 큰 벌금을 면한 것을 언급했다. 아테네 법은 소송 유형에 따라 필요한 배심원 수의 1/5 미만의 찬성표를 받은 원고에게 큰 벌금을 부과하여 경솔한 소송을 막았다.
소크라테스는 자신에게 제기된 두 가지 혐의에 대한 처벌로, 아테네 시의 후원자로 대우받아야 한다고 제안했다. 그는 아테네의 공공 식당인 프리타네이온에서 평생 무료 식사를 제공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이는 올림픽 선수, 저명한 시민, 그리고 아테네의 후원자들에게만 허락된 영예였다.
법정이 무료 식사 제안을 기각한 후, 소크라테스는 투옥과 추방을 고려한 끝에 100 드라크마의 벌금형을 선택했다. 이는 검사들이 제안하고 재판관들이 권장한 사형에 비해 가벼운 처벌이었다. 그의 지지자들인 플라톤, 크리톤, 크리토불루스, 아폴로도로스는 벌금으로 3,000 드라크마(30 미나)를 제안했다.[19] 그러나 소크라테스 재판 재판관들에게 금전적 벌금은 불충분한 처벌이었다.

5. 2. 소크라테스의 최후 변론
기원전 399년 소크라테스는 사형 선고를 받았다. 소크라테스는 먼저 사형에 투표한 배심원들에게 그들이 자신의 지지자들로부터 가혹한 비판을 받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자신의 죽음이 젊은이들을 나서게 하여, 그보다 더 성가시게 아테네 시민들에게 윤리적 행동을 촉구할 것이라고 예언했다(39d).[20]소크라테스는 무죄를 선고한 배심원들에게는 격려를 보냈다. 그의 초자연적인 다이모니온은 그의 법적 변론에 개입하지 않았는데, 그는 이것을 그러한 변론이 올바른 행동이라는 신호로 여겼다. 다이모니온은 소크라테스에게 죽음이 좋은 것일 수 있다고 전했다. 죽음은 소멸(세상의 걱정으로부터의 해방)이어서 두려워할 필요가 없거나, 헤시오도스와 호메로스, 오디세우스와 같은 인물과 영웅들의 영혼이 거하는 더 높은 차원의 존재로의 이동이다.[20]
소크라테스는 자기 변론을 마무리하며 법정에 자신은 고소인—뤼콘, 아뉘토스, 멜레토스—이나 배심원들에게 악의를 품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는 아테네 사람들에게 자신의 세 아들이 덕있게 사는 것보다 물질적 부를 더 중시하거나 지나치게 교만해진다면 그들을 바로잡아 달라고 요청했다. 그렇게 함으로써 정의가 마침내 실현될 것이라고 말했다.[20]
5. 3. 소크라테스의 죽음과 그 영향
소크라테스는 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았다. 배심원 다수가 사형에 찬성했지만, 플라톤은 ''소크라테스의 변론''에서 정확한 투표 수를 밝히지 않았다. 디오게네스 라에르티오스는 280명이 사형에, 220명이 벌금형에 투표했다고 전한다.[20] 소크라테스의 변론은 정치적으로 도발적이고 불손한 어조로 배심원들을 분노하게 했다.[20]소크라테스는 사형에 투표한 배심원들에게 자신의 죽음이 젊은이들을 각성시켜 자신보다 더 성가시게 아테네 시민들에게 윤리적 행동을 촉구하게 할 것이라고 예언했다.
무죄에 투표한 배심원들에게는 격려를 보냈다. 그의 초자연적인 ''다이모니온''이 변론에 개입하지 않은 것을 올바른 행동의 신호로 여겼다. ''다이모니온''은 소크라테스에게 죽음이 좋은 것일 수 있다고 전했다. 죽음은 소멸(세상 걱정으로부터 해방)이거나, 헤시오도스, 호메로스, 오디세우스 같은 인물과 영웅들의 영혼이 있는 더 높은 존재로의 이동이기 때문이다.
소크라테스는 고소인들이나 배심원들에게 악의가 없다고 말했다. 그는 아테네 사람들에게 자신의 세 아들이 덕보다 부를 중시하거나 교만해지면 바로잡아 달라고 요청했다.
결국 소크라테스는 "나는 죽기 위하여, 여러분은 살기 위해서 (떠난다). 그러나 어느 것이 더 행복한지는 신만이 안다."라는 말을 남겼다. ''소크라테스의 변론''은 소크라테스의 영혼을 보여주는 책이며, 제자 플라톤이 소크라테스를 후세에 전하기 위해 쓴 명저이다.
6. 소크라테스의 사상과 유산
기원전 399년 부당한 죄목으로 기소된 소크라테스는 법정 변론을 통해 자신의 철학을 피력했다. 소크라테스의 변론은 그의 사상과 삶, 그리고 그가 후대에 미친 영향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자료이다.[5]
소크라테스는 자신이 모르고 있다는 것을 안다는 점에서 다른 사람들과 다르다고 생각했다. "소크라테스가 첫째가는 현자(賢者)이다"라는 델포이의 신탁은 이러한 그의 생각을 뒷받침하는 것이었다.[1] 그는 사람들에게 무지를 깨우치는 것을 신의 뜻으로 여겼고, 대화를 통해 사람들의 억측을 깨뜨리고자 했다.
또한 소크라테스는 참된 앎을 사랑하고 정신을 높이는 것이 중요하며, 이것이 행복한 삶의 열쇠라고 보았다. 그는 "어떻게 하든 나는 결코 나의 행동을 바꾸지 않을 것이다. 설사 몇 번이나 죽음의 운명에 위협을 받는다 해도."라며 앎에 대한 굳은 의지를 보여주었다.[1]
플라톤의 저서 ''소크라테스의 변론''은 소크라테스의 법정 변론을 담은 책으로, 소크라테스적 대화 형식으로 제시되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를 허구의 한 장르로 분류했지만, 소크라테스라는 인물에 대한 중요한 역사적 자료로 평가받는다.[6][7][8]
《소크라테스의 변론》은 소크라테스의 영혼을 담은 책이자, 제자 플라톤이 스승의 모습을 후세에 전하고자 심혈을 기울인 명저이다.[1]
6. 1. 무지의 지(知)
기원전 399년 소크라테스는 부당한 죄목으로 기소되어 법정에서 변론을 하게 되었다. 소크라테스가 죄를 짓게 된 중요한 원인 중 하나는 사람들이 아무것도 모르면서 알고 있다고 착각하는 무지에 대한 가르침이었다. 소크라테스는 자신도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무지하지만, 자신이 무지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는 점에서 다른 사람들보다 조금 더 지혜롭다고 생각했다. 이것이 "소크라테스가 가장 현명한 사람이다"라는 델포이의 신탁에 대한 그의 해석이었다. 소크라테스는 사람들에게 무지를 깨우치는 것이 신의 뜻이라고 믿고, 엄격한 대화를 통해 사람들의 잘못된 믿음을 깨뜨리고자 했다. 그러나 이러한 행동은 사람들의 앙심을 사게 되었다.[5]소크라테스는 사람들의 무지를 자각하게 하고 참된 지식을 알게 하는 일에만 전념한 것이 아니었다. 그는 신의 지혜에 비하면 인간은 무지한 존재이므로, 더욱 진정한 지혜를 사랑하고 정신을 고양해야 하며, 신체나 재산보다 먼저 이러한 일에 힘써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지혜를 사랑하고 추구하는 것이 인간이 행복하게 사는 가장 중요한 열쇠라고 믿었다. 소크라테스는 "아테네 시민들이여, (중략) 어떻게 하든 나는 결코 나의 행동을 바꾸지 않을 것이다. 설사 몇 번이나 죽음의 운명에 위협을 받는다 해도."라며 지혜를 사랑하는 것에 대한 굳은 각오를 밝혔다. 결국 사형 선고를 받았지만, 소크라테스는 시종일관 두려움 없이 자신의 소신을 밝혔다. "하지만 이제 떠날 때가 왔다. 나는 죽기 위하여, 여러분은 살기 위해서. 그러나 그 어느 것이 더 행복한가에 대해서는 신 이외에 아는 자는 없다."라는 말로 이 글은 마무리된다.[5]
플라톤(기원전 429–347)의 저서 ''소크라테스의 변론''은 소크라테스가 부패 및 불경죄 혐의에 대한 법적 변호를 설명하는 여러 ''변론'' 중 하나이다. 대부분의 ''변론''은 소크라테스 재판(기원전 399) 이후 10년 안에 출판되었다. 따라서 플라톤의 ''소크라테스의 변론''은 소크라테스에 대한 초기 철학적 변론으로, 소크라테스적 대화 형식으로 제시되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나중에 이것을 허구의 한 장르로 분류했지만, 여전히 철학자 소크라테스(기원전 469–399)에 대한 유용한 역사적 자료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특히 소크라테스가 멜레토스를 심문하는 장면에서 대화가 심문을 잘 활용한 사례라고 생각했다.[6][7][8][9]
본 문서에서는 델포이 신탁에서 시작된 소크라테스 철학자(애지자)의 삶의 경과와 함께 "무지의 지"에 대한 언급이 이루어진다. 자신이 알고 있는 것 이상을 알고 있다고 착각하는 "지혜와 어리석음을 함께 지닌" 상태에 빠진 사람들과 대조적으로, 잘 알지도 못하는 것을 안다고 자만하지 않는 "지혜와 어리석음을 지니지 않고 있는 그대로인" 자로서의 소크라테스 자신이 언급된다.
또한 소크라테스가 사용하는 "문답법"이 그러한 상대의 지혜를 검증하기 위한 것임도 함께 언급된다. 이 "무지의 지" 모티브는 이후 "죽음·사형", "죽음 이후의 세계"에 대한 언급에서,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 또한 잘 알지도 못하는 것을 아는 것처럼 가장하는 것으로서 다시 등장한다.
참고로, 초기 말기의 대화편인 『메논』에서는 이 "무지의 지"가, 또는 초기 대화편에서 자주 등장하는 "아포리아"(막다름)의 자각이, 사람들을 단순한 "생각"(사견, 억측, doxa 독사)에 안주하는 것에서 끌어내어, 원인·근거를 수반한 이론적 "지식"(episteme 에피스테메)에 이르게 하는 중요한 계기가 됨이 명확하게 설명되어 있다.
6. 2. 영혼의 중요성
소크라테스는 신체나 재산보다 먼저 정신을 높이는 일에 마음을 써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우리들은 신의 지(知)에 대해서는 무지와 다름없으므로, 그러면 그럴수록 참된 앎을 사랑하고 정신을 높이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였다. 이러한 지(知)를 사랑하고 구하는 것이야말로 인간이 행복하게 사는 가장 큰 열쇠라고 하였다. 소크라테스는 "아테네 시민들이여, (중략) 어떻게 하든 나는 결코 나의 행동을 바꾸지 않을 것이다. 설사 몇 번이나 죽음의 운명에 위협을 받는다 해도."라며 앎을 사랑하는 것에 대한 굳은 각오를 보여주었다.[5]6. 3. 정의와 불의
소크라테스는 불의를 행하는 것이 자신에게 더 큰 해가 된다고 믿었다. 그는 정의란 "숙고하고 검토한 결과, 최선이라고 생각되는 생각"이며, 그것을 따름으로써 어떤 경우에도, 심지어 사후의 저승에서조차 "자신을 제대로 변명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또한 소크라테스는 "어떤 경우에도 고의로 부정을 행하지 않는다"는 윤리관을 가지고 있었다. 모르고 부정을 행했다면, 고친다는 것이다.
6. 4. 소크라테스식 문답법
소크라테스는 신탁의 의미, 즉 무지한 사람이 어떻게 가장 현명한 사람이 될 수 있는지 밝히기 위해 정치가, 시인, 장인들을 심문했다. 그는 정치가들이 자신처럼 현명하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시인들은 자신의 시를 이해하지 못했으며, 장인들은 자신이 알지 못하는 것에 대해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다.[15] 이러한 관점에서 소크라테스는 자신을 델포이의 신탁 대변자로 여겼다.소크라테스는 자신이 심문했던 "현명한 사람들"처럼 사기꾼이 되는 것보다 아테네의 소크라테스 자신이 되는 것을 선호한다고 말했다. 그는 자신보다 현명한 사람을 찾는 과정에서 사회의 각성제로 여겨지게 되었고 아테네의 정치적으로 영향력 있는 인물들 사이에서 악명을 얻었다고 말한다.
소크라테스는 멜레토스를 심문하면서 아무도 고의로 다른 사람을 타락시키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타락시킨 사람은 나중에 타락당한 사람의 복수로 피해를 입을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반대 신문에서 소크라테스는 멜레토스가 스스로 모순되는 말을 하게 만들었다. 즉, 소크라테스는 정령과 반신을 믿는 무신론자라는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판사들에게 멜레토스가 스스로 모순된 말을 했다고 말하고, 논리적 모순을 식별하기 위한 지능 검사를 설계했는지 묻는다.
6. 5. 소크라테스의 유산과 현대적 의의
소크라테스는 오늘날 우리 사회에 비판적 사고, 진리 추구, 정의로운 삶의 중요성을 일깨워준다. 그는 무지를 자각해야 한다고 강조하며, 끊임없이 질문하고 대화하는 소크라테스식 문답법을 통해 진리에 다가가고자 했다. 이러한 그의 가르침은 현대 사회의 문제점들을 비판적으로 성찰하고,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는 지혜를 제공한다.[1]그는 사람들이 아무것도 모르면서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을 비판했다. 자신은 모르고 있다는 점에서는 다른 사람들과 같지만, 모르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는 점에서 그들보다 조금 더 지혜롭다고 생각했다. 이것이 "소크라테스가 첫째가는 현자(賢者)이다"라고 하는 델포이의 신탁에 대한 그의 해석이었다.[1]
소크라테스는 사람들에게 무지를 깨우치는 일이 신의 뜻이라고 생각하여 대화를 통해 사람들의 억측을 깨뜨려 나갔다. 그는 신의 지혜에 대해서는 인간이 무지와 다름없으므로, 진정한 지혜를 사랑하고 정신을 높여야 하며, 신체나 재산보다 먼저 이 일에 마음을 써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지혜를 사랑하고 구하는 것이야말로 인간이 행복하게 사는 가장 큰 열쇠라고 생각했다.[1]
그는 "아테네의 시민들이여, (중략) 어떻게 하든 나는 결코 나의 행동을 바꾸지 않을 것이다. 설사 몇 번이나 죽음의 운명에 위협을 받는다 해도."라고 말하며, 지혜를 사랑하는 것에 대한 굳은 각오를 보여주었다. 결국 사형이 선고되었지만, 그는 시종일관 두려움 없이 자신의 소신을 밝혔다. "하지만 이제 떠날 때가 왔다. 나는 죽기 위하여, 여러분은 살기 위해서. 그러나 그 어느 것이 더 행복한가에 대해서는 신 이외에 아는 자는 없다."라는 마지막 구절은 그의 철학적 태도를 잘 보여준다.[1]
《소크라테스의 변론》은 위대한 철학자 소크라테스의 영혼을 담은 책이며, 제자인 플라톤이 스승의 모습을 후세에 전하기 위해 심혈을 기울여 쓴 불후의 명저이다.[1]
7. 한국 사회에 대한 시사점
Σωκράτης|소크라테스grc는 델포이 신탁을 믿고 신에 대한 봉사로서 지혜를 탐구했으며, "다이모니온의 목소리"를 믿고 "선인에게는 생전에도 사후에도 해가 없다"고 단언하는 등 독실한 모습을 보였다.[32] 이는 이성적인 면모와 함께 종교적인 신비주의자의 면모를 동시에 보여주는 것으로, 한국 사회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32]
7. 1. 교육 문제
소크라테스가 청년 교육에 열정적이었다는 것은 플라톤의 다른 대화편에도 묘사되어 있으며, 이 재판의 고소장에서도 "청년을 타락시켰다"고 언급되어 있다.[1]본 편에서는 소크라테스와 고발자 멜레토스와의 문답 속에서 청년 교육에 대한 몇 가지 언급이 있다. 멜레토스가 국가법과 소크라테스를 제외한 모든 아테네 시민이 청년들에게 있어 선도자가 된다고 말한 것에 대해, 소크라테스는 청년 교육은 말의 조련과 마찬가지로 그 길에 능숙한 자에 의해 이루어져야 하며, 멜레토스의 주장은 청년 교육에 대한 무관심의 표현이라고 비판한다.[1]
"일반 대중의 의견보다 일부 전문가의 의견이 존중되어야 한다"는 생각은 속편인 크리톤에서도 반복해서 제기된다.[1]
7. 2. 정치, 사회적 문제
본문에서는 소크라테스가 직접 경험한 두 가지 일화와 함께 "현실 정치에 관여하는 위험성"이 언급된다. 또한 "정의를 위해 싸운다면 공인이 아닌 사인으로서 살아야 한다"는 생각도 제시되어 있다. 『7번째 편지』에도 적혀 있듯이, 이러한 태도는 저자인 플라톤 자신의 삶의 태도와도 일치한다.이 글에서는 대중이 "아리스토파네스 등의 소문에 휩쓸리는 낡은 비난자들", "자신들의 잘못을 감추기 위해 비판자들을 억압하려는 자들"로 비판적으로 언급되고 있다.
또한, 소크라테스 이전에도 그러한 대중에 의해 선인들이 멸망해 왔으며,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는 견해, 비판자들을 억압하는 것은 더욱 극단적인 반발을 불러일으키므로, 차라리 스스로 선해지도록 노력하는 것이 상책이라는 견해가 함께 제시된다.
7. 3. 더불어민주당과 국민의힘에 대한 비판적 성찰
본 글에서는 소크라테스가 직접 경험한 두 가지 에피소드와 함께 "현실 정치에 관여하는 위험성"이 언급된다. 또한 "정의를 위해 싸운다면 공인이 아닌 사인으로서 살아야 한다"는 생각도 제시되어 있다. 『7번째 편지』에도 적혀 있듯이, 이러한 태도는 저자인 플라톤 자신의 삶의 태도와도 일치한다.[1]이 글에서는 대중이 "아리스토파네스 등의 소문에 휩쓸리는 낡은 비난자들", "자신들의 잘못을 감추기 위해 비판자들을 억압하려는 자들"로 비판적으로 언급되고 있다.[1]
소크라테스 이전에도 그러한 대중에 의해 선인들이 멸망해 왔으며,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는 견해와 함께, 비판자들을 억압하는 것은 더욱 극단적인 반발을 불러일으키므로 차라리 스스로 선해지도록 노력하는 것이 상책이라는 견해가 제시된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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